세계유산은 오래된 건축물이나 유적을 보존하는 일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그것이 왜 중요한지, 누구의 기억을 담고 있는지,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설명할 때 비로소 유산은 현재의 삶과 연결된다.
같은 장소라도 어떤 관점에서 말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기억으로 남을 수 있고, 누군가에게는 자부심의 공간이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상처와 갈등의 장소일 수도 있다. 그래서 세계유산을 둘러싼 핵심 과제는 보존을 넘어 ‘해석’으로 이동하고 있다.
외교부가 17일 건국대학교에서 개최한 ‘2026년 세계유산해석 국제회의’는 바로 이 문제를 다룬 자리였다. 이번 회의는 유산해석이 직면한 도전을 진단하고, 앞으로 국제사회가 어떤 원칙과 규범을 마련해야 하는지를 논의하기 위해 열렸다.
특히, 올해 회의는 한국이 2016년부터 이어 온 세계유산해석 국제회의의 열 번째 행사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는 지난 10년간 한국이 유산해석 분야의 국제 논의를 꾸준히 축적하고, 이를 세계유산협약 체제의 발전과 연결해 왔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외교부는 이날 유산해석설명국제위원회(ICOMOS-ICIP)와 공동으로 ‘2026년 세계유산해석 국제회의’를 개최했다. ICOMOS 한국위원회와 유네스코 한국위원회가 공동 주관했고, 유네스코 세계유산 국제해석설명센터(WHIPIC)와 건국대학교 세계유산연구소가 협력 기관으로 참여했다.
회의에는 테레사 파트리시우(Teresa Patricio) ICOMOS 위원장을 비롯해 세계유산 분야 전문가와 관계자, 유산해석에 관심을 가진 참가자 등 100여 명이 참석했다. 주제는 ‘유산해석의 도전과 미래: 국제 규범 개정을 향하여’였다. 이는 유산해석이 단순한 안내와 설명의 기술을 넘어, 국제사회가 함께 다뤄야 할 제도적·윤리적 과제로 발전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 보존을 넘어 ‘무엇을 어떻게 말할 것인가’의 문제로
유산해석은 유적이나 기념물의 역사적 사실을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유산이 지닌 가치와 의미를 오늘의 사회에 전달하고, 서로 다른 기억과 관점을 조정하며, 지역공동체와 방문객이 그 의미를 함께 이해하도록 만드는 과정이다.
세계유산 제도에서는 각 유산이 인류 전체에 중요하다고 인정되는 ‘탁월한 보편적 가치(Outstanding Universal Value)’를 지녀야 한다. 그러나 그 가치가 등재 문서에 기록돼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하지는 않다. 실제 현장에서는 그 가치가 어떤 이야기와 전시, 교육과 안내를 통해 전달되는지가 중요하다. 해석이 지나치게 단순하거나 한쪽의 관점만을 반영하면 유산의 복합적인 의미가 축소될 수 있고, 때로는 역사적 갈등을 다시 키울 수도 있다.
이 때문에 유산해석은 보존 정책의 부수적인 영역이 아니라, 세계유산 관리의 핵심 요소로 자리 잡고 있다. 물리적 형태를 지키는 일이 유산의 외형을 보존하는 것이라면, 해석은 그 유산이 사회 속에서 살아 있는 의미를 유지하도록 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 10년간 이어진 국제회의, 해석의 범위를 넓혀 오다
한국은 2016년부터 세계유산해석 국제회의를 이어 오며 관련 국제 논의를 발전시켜 왔다. 제1차 회의에서는 해석전략의 의미와 중요성을 다뤘고, 제2차 회의에서는 유산 관리에서 해석전략이 갖는 역할을 논의했다. 제3차 회의는 세계유산협약 이행 현황과 당면과제에 초점을 맞췄으며, 제4차 회의에서는 유산해석을 통한 문화 간 화해의 중요성을 다뤘다.
2020년 열린 제5차 회의에서는 유산해석에 대한 인권적 접근이 논의됐다. 이는 유산을 설명할 때 국가나 제도의 관점만이 아니라, 그 역사 속에서 소외되거나 피해를 경험한 사람들의 목소리까지 고려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반영했다. 제6차 회의에서는 세계유산해석의 원칙과 미래 발전 방향을 논의했고, 제7차 회의는 평화와 화해를 위한 유산해석을 주제로 삼았다.
이어 제8차 회의에서는 지역공동체의 세계유산 제도 참여 방안을 논의했으며, 제9차 회의에서는 갈등 해결과 평화 구축을 위한 해석 원칙과 이행 문제를 다뤘다. 이런 흐름은 지난 10년간 유산해석의 논의 범위가 단순한 정보 전달에서 인권, 공동체 참여, 갈등 해결, 평화 구축의 영역으로 확대됐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번 제10차 회의가 ‘국제규범 개정’을 주제로 내세운 것도 이러한 축적 위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제는 유산해석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단계를 넘어, 국제사회가 실제로 적용할 수 있는 원칙과 기준을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지 논의할 시점에 이르렀다는 뜻이다.
▼ 유산의 가치는 해석될 때 사회와 만난다
오진희 외교부 공공문화외교국장은 개회사에서 유산해석이 세계유산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이해하고 전달하는 데에서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또한, 그동안 유산해석 분야의 논의 발전에 이바지해 온 전문가들의 노력을 평가했다.
이 발언은 세계유산의 가치가 단지 전문가의 평가나 국제기구의 결정으로 완성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 준다. 탁월한 보편적 가치는 국제사회가 인정한 가치이지만, 그것이 실제로 살아 있는 의미가 되기 위해서는 지역 사회와 방문객, 미래 세대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전달되어야 한다.
특히, 역사적 갈등이나 식민 지배, 전쟁, 인권침해와 관련된 유산은 해석의 중요성이 더욱 크다. 한쪽의 성취만을 강조하거나 피해의 기억을 배제할 경우, 유산은 화해의 공간이 아니라, 갈등의 상징이 될 수 있다. 반대로 다양한 관점과 목소리를 담은 해석은 과거를 지우지 않으면서도 공동의 이해를 넓히는 토대가 될 수 있다.
따라서, 유산해석은 유산의 의미를 고정하는 작업이 아니라, 다양한 사회 구성원이 그 의미를 함께 논의하고 갱신하는 과정에 가깝다. 국제규범 역시 하나의 정답을 강요하기보다, 포용성과 참여, 인권과 균형이라는 기본 원칙을 제시하는 방향으로 발전할 필요가 있다.
▼ 세계유산위원회 의장국으로서의 책임
오진희 외교부 공공문화외교국장은 한국이 제48차 세계유산위원회 의장국으로서 유산해석의 포용적 접근을 포함해 세계유산협약 체제의 발전을 위해 지속해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제48차 세계유산위원회는 7월 19일부터 29일까지 부산에서 개최된다.
한국이 세계유산위원회 의장국을 맡은 상황에서 이번 국제회의가 열린 것은 상징적 의미가 있다. 세계유산위원회가 유산의 등재와 보존 상태, 협약 이행을 논의하는 공식적인 다자외교의 장이라면, 세계유산해석 국제회의는 그 제도를 뒷받침할 학술적·윤리적 기반을 논의하는 자리다. 두 회의가 연이어 열리면서 한국은 제도와 담론 양쪽에서 세계유산 논의를 연결하는 역할을 맡게 됐다.
특히, ‘포용적 해석’은 앞으로 세계유산 제도가 풀어야 할 중요한 과제다. 유산의 등재와 관리 과정에서 지역공동체가 충분히 참여하는지, 소수자와 피해자의 목소리가 반영되는지, 관광과 보존 사이의 균형이 이뤄지는지에 따라 세계유산 제도의 신뢰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이 의장국으로서 이러한 문제를 국제사회와 함께 논의하겠다는 것은 세계유산 외교의 범위를 등재 경쟁이나 문화적 홍보를 넘어, 제도의 질적 발전으로 확장하겠다는 의미로 읽힌다.
▼ 유산해석은 공공외교이자 기억의 외교
이번 회의는 외교부가 공동 개최했다는 점에서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세계유산은 문화재 정책의 영역이면서 동시에 국제사회에서 국가 간 인식과 기억이 만나는 공공외교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유산을 어떻게 설명하느냐는 한 국가가 자신의 역사를 어떻게 이해하고, 다른 국가와 어떤 관계를 맺으려 하는지를 보여 준다. 갈등의 역사를 일방적으로 해석하면 외교적 마찰이 커질 수 있지만, 다양한 관점과 역사적 사실을 충실히 반영한다면 유산은 상호 이해와 화해의 장이 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유산해석은 단순한 문화 콘텐츠 제작이 아니라, ‘기억의 외교’라고 할 수 있다. 과거를 둘러싼 서로 다른 기억을 존중하면서도 공동의 미래를 위한 대화의 가능성을 열어 가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 국제규범 개정, 선언에서 실행으로 나아가야
이번 회의의 주제가 국제규범 개정이라는 점은 유산해석 논의가 새로운 단계에 들어섰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러나 국제규범은 문서로 만들어지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실제 유산 현장에서 적용될 수 있는 구체성과 실행력을 갖춰야 한다.
유산해석의 원칙이 현장에서 작동하려면 관리기관과 지역공동체, 전문가와 방문객 사이의 참여 구조가 마련돼야 한다. 해설문과 전시, 교육 프로그램, 디지털 콘텐츠에도 포용성과 정확성, 다양한 관점이 반영되어야 한다. 갈등이 있는 유산의 경우 서로 다른 집단이 해석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절차도 중요하다.
또한, 국제규범은 국가와 지역의 차이를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세계유산은 각기 다른 역사와 문화, 정치적 맥락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보편적 원칙을 세우되, 현장의 특수성을 존중하는 유연한 기준이 필요하다.
정부는 앞으로도 유산해석설명 분야의 국제 논의를 주도하며 관련 국제규범의 발전에 적극적으로 이바지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이는 한국이 지난 10년간 축적한 논의를 일회성 회의로 끝내지 않고, 국제사회의 제도 개선으로 연결하겠다는 의지로 볼 수 있다.
세계유산을 지키는 일은 돌과 건물을 보존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그 안에 담긴 기억을 누구의 목소리로, 어떤 관점에서, 다음 세대에게 어떻게 전달할 것인지까지 고민해야 한다. 유산의 물리적 훼손만큼 위험한 것은 그 의미가 단순화되거나 특정한 기억이 지워지는 일일 수 있다.
‘2026년 세계유산해석 국제회의’는 이러한 문제를 국제규범의 차원에서 다시 묻는 자리였다. 지난 10년 동안 한국이 이어 온 유산해석의 논의가 이제 포용성과 인권, 평화와 지역공동체 참여를 아우르는 국제적 원칙으로 발전할 수 있을지가 앞으로의 과제다.
세계유산의 미래는 무엇을 보존하느냐의 문제뿐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기억하고 설명하느냐에 달려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