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오래전부터 한 가지 익숙한 모순을 잘 알고 있다. 내가 하면 괜찮은 일인데, 같은 일을 남이 하면 못마땅하게 여기는 태도다. 이를 요즘 말로 줄이면 ‘내로남불’이다.
“내가 하면 로맨스이고 남이 하면 스캔들”이라는 뜻이다. 이 짧은 표현이 널리 쓰인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사람이 일상 속에서 이런 이중적 태도를 자주 경험하고 있다는 뜻이다.
문제는 이것이 단순히 말의 유행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흔들고 인간관계를 병들게 하며 사회의 신뢰를 무너뜨리는 삶의 방식이라는 데 있다. 이 글을 읽으면서도 자기의 이런 모습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심각한 ‘내로남불’ 환자라는 것이다.
‘내로남불’은 왜 발생하는가. 가장 근본적으로는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비롯된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보려는 경향이 있다. 자기 사정은 크게 느끼고, 타인의 사정은 작게 여긴다.
자기 고통에는 민감하면서도 남의 불편에는 둔감하다. 자기 행동은 상황과 맥락으로 설명하려 하지만, 남의 행동은 결과만 보고 쉽게 판단한다. 바로 여기에서 ‘내로남불’이 시작된다. 기준은 하나인데, 적용은 둘로 나뉜다. 자신에게는 관대하고 남에게는 엄격한 이중 잣대가 작동하는 것이다.
이 문제는 일상에서 아주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아파트 생활을 해 본 사람이라면 층간소음으로 인한 갈등이 얼마나 심각한지 잘 알 것이다. 밤늦게 울리는 발소리, 끊이지 않는 가구 끄는 소리, 뛰어다니는 소음은 단지 귀를 거슬리게 하는 수준을 넘어, 사람의 정신과 몸을 함께 지치게 만든다. 층간소음으로 스트레스를 겪어 본 사람은 안다. 이것이 단순한 예민함의 문제가 아니라, 잠을 깨우고 신경을 날카롭게 만들며 일상의 평온을 무너뜨리는 고통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런데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 가운데 적지 않은 수는 자신이 얼마나 큰 소음을 내는지조차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 더 나아가 주의를 받아도 아랑곳하지 않거나, 오히려 더 큰 소음으로 맞서는 일도 있다. 왜 그럴까. 그것은 소음이 자기에게는 생활이지만 남에게는 고통이 된다는 사실을 상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기 집에서 자기가 움직이는 일은 당연하다고 여긴다. 그런데 그 당연함이 타인의 집에서는 불안과 피로로 바뀔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내로남불’의 전형적 구조다. 내가 하는 것은 사소한 일이고, 남이 문제 삼는 것은 예민한 반응쯤으로 치부해 버린다.
물론, 이런 문제의 배경에는 구조적 원인도 있다. 층간소음 갈등의 본질적 출발점은 시공의 부실에 있다. 아파트를 단지 많이 짓는 데만 집중하고, 생활 소음을 충분히 흡수하거나 차단할 수 있도록 공학적으로 대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사무실 건물에서는 층간소음이 이토록 빈번한 사회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 점에서 층간소음 문제를 오직 개인의 예절 문제로만 돌리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건축에서 더 세심하고 책임 있게 설계했어야 했다. 사회적 문제는 개인의 인격과 함께 구조의 결함에서도 발생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구조적 원인이 있다고 해서 개인의 책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공동체 의식의 결여가 문제를 더 악화시킨다. 사람이라는 존재는 본래 공동체 속에서 살아간다. 공동체를 이룬다는 것은 단지 같은 공간에 모여 산다는 뜻이 아니다. 서로 다른 생활 방식과 감각, 형편과 습관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기 위해 다양성을 인정하고, 일정한 불편을 감수하며, 서로를 배려하는 원리를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공동체는 자유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자유를 절제할 줄 아는 책임감이 함께 있어야 비로소 진정한 공동체가 된다.
‘내로남불’은 바로 이 공동체의 원리를 허무는 태도다. 공동체 안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은 실수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기준과 남의 기준을 다르게 적용하는 사람이다. 실수는 사과와 수정으로 회복될 수 있다. 그러나 이중 잣대는 문제를 인정하지 않게 만들고, 인정하지 않으니 고치지도 못하게 한다. 그러므로 ‘내로남불’은 단순한 성격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자기중심성에 갇혀 타인의 고통을 자기 일처럼 느끼지 못하는 인식에서 비롯된 병이며,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윤리적 결함이다.
이를 극복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사고다. 처지를 바꾸어 생각해 보라는 오래된 가르침은 절대 낡지 않았다. 내가 아래층에 살고 있다면 어떨까, 내가 밤마다 그 소리를 듣는 사람이라면 어떨까, 내가 상대의 상황에 놓인다면 같은 태도를 유지할 수 있을까를 묻는 것이다.
이 질문 하나가 사람의 태도를 바꾼다. 역지사지는 단순한 미덕이 아니다. 그것은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가장 현실적인 지혜다.
여기에 더해 공감 능력이 필요하다. 공감이란 남의 감정을 막연히 이해하는 척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불편과 고통이 실제로 얼마나 큰지 상상하고 받아들이는 힘이다. 공감은 사람을 멈추게 하고, 자기 행동을 다시 보게 한다. 배려도 마찬가지다. 배려는 큰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조금 덜 편하면 남이 훨씬 더 편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태도다. 공동체는 법 이전에 이런 작은 배려들 위에서 유지된다.
그러나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역지사지와 공감, 배려는 생각으로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그것이 실제 생활 습관이 되고, 매일의 행동 속에서 반복되어야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성찰적 실천’이 중요해진다. 성찰적 실천이란 하루하루 자신을 돌아보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인식한 뒤, 다음 행동을 실제로 바꾸는 것이다.
소음을 줄여야겠다고 생각했다면 정말로 조심해야 하고, 타인을 존중해야겠다고 깨달았다면 말과 행동에서 그것이 드러나야 한다. 성찰 없는 실천은 방향을 잃기 쉽고, 실천 없는 성찰은 공허한 반성으로 끝나기 쉽다. 그래서 진짜 변화는 성찰과 실천이 함께 갈 때 가능하다.
우리가 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고 싶다면, ‘내로남불’의 방식을 버려야 한다.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하지 않고, 내가 바라는 존중을 남에게도 똑같이 적용하며, 내 자유가 타인의 평온을 무너뜨리지 않도록 스스로 절제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공동체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지켜야 할 삶의 원리다.
‘내로남불’은 자기만 편하면 된다는 생각이 낳은 결과다. 반대로 ‘역지사지’는 함께 살아야 한다는 자각에서 시작된다. 세상은 거창한 제도만으로 아름다워지지 않는다. 일상에서 서로를 대하는 작은 태도, 한 번 더 생각하는 마음, 나와 남에게 같은 기준을 적용하려는 정직함이 쌓일 때 비로소 조금씩 나아진다.
그러므로 우리가 싸워야 할 것은 단지 층간소음이 아니다. 그 소음을 발생시키고도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자기중심의 태도, 곧 ‘내로남불’의 습성 그 자체다. 따라서 우리가 길러야 할 것은 타인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역지사지의 자세, 그리고 그것을 날마다 생활 속에서 성찰하고 실천하는 삶의 태도다.

